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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거티브 볼륨(negative volume)

우리는 어떤 공간에 조각이 놓이면 그것이 차지하는 용적만을 작품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편견이다. 하나의 조각이 특정한 공간에 놓이면 그 주위 공간 모두가 조각의 영향권 아래 들어온다. 공간 전체에 새로운 성격과 특질이 부여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각가들은 구멍도 그저 ‘빈 곳’이 아니라 ‘네거티브 볼륨’(negative volume)이라고 불러 작품의 구성요소에 포함시킨다. 물질과 공간이 서로 대응하여 공간 전체에 새로운 성질과 새로운 기운을 창조해 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각가는 근본적으로 공간의 창조자라고 할 수 있다. 공간 창조 행위로서의 조각의 특질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토르소, 즉 팔다리 따위가 절단된 인체 형상이다.



고대의 조각을 보면 사람 형상은 대부분 전신상, 즉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를 온전하게 표현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다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 미술가들이 파손된 채 발굴된 고대 조각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이다. ‘벨베데레의 토르소’는 이때 발굴된 유물의 대표적인 것으로 이 조각은 근대 조각가들이 파손된 고대의 작품에서 얼마나 신선한 아름다움을 느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많이 파손된 상태이지만, 강한 힘과 에너지가 느껴지는 미완성의 미학이 느껴져 서양의 조각가들은 조각에서 의도적으로 머리나 팔, 다리를 제거한 토르소를 조각의 한 장르로 인정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토르소는 단순히 몸통 자체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조각이 아니다. 다양한 표정의 절단을 통해 인체의 볼륨과 선이 주위 공간과 어떤 조화 혹은 긴장을 자아내는지, 그로 인해 공간이 어떤 성격을 띠고 어떤 미학적 특질이 형성되는지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즉 공간의 역할과 의미가 고도로 강조된 조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월의 풍화로 신체 일부가 떨어져나간 일부 토르소 작품들의 경우 사지가 제대로 붙어 있었다면 오히려 인상적인 느낌을 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조각이 하나의 심지라면 공간은 불과 빛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타오르게 한다. 특히 근대 조각가들은 고대 조각가들에 비해 공간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빈 공간 자체를 조형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때로는 빈 공간을 조각보다 우선적인 조형 요소로 취급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이렇듯 조각의 역사는 단순히 덩어리를 만드는 데서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진보’해 왔고, 그에 따라 조각가 역시 형상의 창조자에서 공간의 창조자로 ‘진화’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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